연합뉴스 금융감독원이 11일 홍콩 H지수 ELS와 관련한 책임분담 기준안 발표를 예고하며 판매 금융사에 선제적 배상안을 요구하고 나선 가운데, 은행권은 요지부동이다. 은행권에서는 금융당국의 책임분담 기준안이 나오고 나서야 자율배상에 대한 논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책임 소재가 가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선배상을 할 경우 배임 논란이 불거질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하지만 당국의 유화적 발언에도 요지부동인 이유는 그간 금감원이 대규모 금융사고와 관련해 '무관용 원칙'을 펼쳐 왔기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금감원 '제재 감경' 발언에도 '요지부동' 은행권
금융정의연대 등 단체 회원들이 지난 2월 서울 종로구 감사원 앞에서 열린 홍콩 ELS 대규모 손실사태 관련 금융당국에 대한 감사원 공익감사 청구 기자회견에서 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 금감원은 제재 감경과 인센티브를 거론하며 선(先)배상을 유도했지만 은행들은 쉽사리 움직이지 않고 있다.
앞서 이복현 금감원장은 이복현 원장은 "불법과 합법을 떠나 금융권 자체적인 자율배상이 필요하다고 보는데 최소 50%라도 먼저 배상을 진행하는 것이 소비자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면서 "자발적으로 일부 배상하면 소비자로서 일단 유동성이 생길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은행권은 그간 난감한 표정을 지어왔다. 선제적으로 자율배상할 경우 불완전판매를 인정하는 모습이 되고 향후 배임 논란에 휩싸일 수 있는 우려도 있어서다. 그렇다고 금감원의 자율배상 언급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진퇴양난이다.
은행권은 금융당국의 가이드라인이 발표된 뒤 배상 논의를 이어갈 수 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에 맞춰 녹취, 설명의무 등을 지켰으면 불완전판매 소지가 적어진다"며 "선제적으로 자율배상을 하면 불완전판매를 했다고 인정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고, 은행 수익에도 영향을 미쳐서 배임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섣불리 먼저 배상안을 내놓았다가 여론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점도 고려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은행권은 과거 대규모 금융사고가 벌어졌을 당시 선배상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제재 감경에는 반영되지 않았던 전례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 2020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당시 판매 금액이 가장 많았던 하나·우리은행은 금감원 제재심의위원회 개최 전 수백억원을 선배상하고, 배상위원회를 꾸려 배상 절차를 진행했지만 함영주 하나은행장과 손태승 우리금융지주 회장은 중징계를 면할 수 없었다.
특히 지난해 금융사 지배구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내부통제 실패 시 CEO를 제재할 수 있도록 하면서, CEO 사법리스크에 대한 은행권의 걱정은 커졌다.
또다른 시중은행 관계자는 "홍콩ELS 사태의 규모와 사회적 파장이 이미 커질대로 커진 상황에서 금융당국이 얼마나 제재 감면을 해 줄 수 있을지 의문"이라면서 "금융사 입장에서는 무관용 원칙에 대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구두로 인센티브를 강조한 상황을 완전히 믿기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이복현 원장은 불과 한달 전인 2024년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홍콩ELS사태를 두고 "올해부터는 고객의 이익을 외면하고 정당한 손실 인식을 미루는 등의 그릇된 결정을 내리거나 금융기관으로서의 당연한 책임을 회피하면 시장 퇴출도 불사하겠다"며 강하게 경고한 바 있다.
책임기준안 발표 이후 은행과 당국 '줄다리기' 이어질 듯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류영주 기자금융당국의 책임분담안 공개가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책임분담안 공개 이후 본격적인 배상을 위해 당국과 은행 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질 예정이다. 앞선 두 차례의 홍콩ELS 현장검사에서 불완전판매 정황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는 금감원은 이미 은행 임원 제재나 과징금 등에 대한 법리 검토에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당국은 금소법 시행령에 따라 '위반행위에 따른 피해 배상 정도'를 감안해 과징금을 감경할 수 있기 때문에 이번에도 당국의 배상안을 은행들이 대부분 수용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11일 책임분담기준안이 발표되고 나면 18일에는 이복현 금감원장이 은행연합회 이사회를 만나는데, 이 자리에서 자율배상 관련 구체적 논의가 이뤄질 전망이다. 자율배상이 되지 않은 부분은 소비자와 은행이 분쟁조정위원회에서 협상을 하게 되고 여기서도 안되면 민사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금융당국은 일괄배상은 고려하지 않고 있어 100% 배상을 원하는 투자자들이 대규모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도 커 보인다.
앞서 이복현 원장은 CBS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연령층, 투자 경험, 투자 목적, 창구에서 어떤 설명을 들었는지 등 수십 가지 요소를 매트릭스에 반영해 어떤 경우에 소비자가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고, 어떤 경우 은행·증권사가 책임져야 하는지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현재 자기책임 원칙과 금융소비자보호 원칙 가운데 비교 형량할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고 설명했다. 이 원장은 "사실상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분들을 상대로 이같은 상품을 판 경우가 있을 수 있다"며 "그런 경우 해당 법률 행위 자체에 대한 취소 사유가 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100% 내지는 그에 준하는 배상이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다만 "일괄 배상은 준비하고 있지 않고 있다"며 경우에 따라 배상이 없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ELS 재투자자에 대해 "최근 문제 되는 경우는 2020~2021년 가입자"라며 "이전 2016~2017년에도 홍콩 H지수가 급락한 적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재투자를 하더라도 그때 상황에 비춰 위험에 대한 적절한 고지가 있었으면 은행, 증권사는 책임을 상당히 면할 수 있겠지만 고지가 없었다면 원칙에 따라 적절한 (배상) 배분이 이뤄져야 될 것"이라고 말했다.